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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재난안전

조선시대에 불이 나면? 우리 선조들의 재난사고 대처법

화재 사고가 나면, 우리는 119에 신고를 하죠! 그렇다면,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들은 이럴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선조들의 기지와 우리나라 안전 시스템의 발전 과정을 알아보는 시간! 오늘은 우리나라의 역사 속 안전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재사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재사고는 언제일까요? 기록상, 우리나라의 첫 화재는 132년(신라 지마왕 21) 신라의 궁궐 남문 화재사고인데요. 그 후에도 삼국시대와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화재 기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불이 자연적으로 발생해 화재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실제로, 333년 백제 비류왕 30년 5월에는 별똥이 떨어져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태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져 일어난 불이라는 뜻에서 ‘천화(天火)’라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인구가 늘어나고 병란이 잦아지면서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요. 조선시대 역시, 한성부를 비롯해 평양부, 함흥부 등 도시들이 복잡해지고 수공업이 급속 성장하고, 상업 도시가 발달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과거에는 화재를 어떻게 진압했을까? 

1426년 2월 26일, 세종대왕은 방화업무 담당 관청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화재가 일어나자 1431년 5월, 최초의 소방대라고 할 수 있는 금화군(禁火軍)이 만들어졌고 세조 때인 1467년 12월 20일, 멸화군(滅火軍)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멸화군은 정원 50명으로 도끼 20개와 쇠갈고리 15개, 삼끈으로 만든 동아줄 5개를 지급받아 진화 역할을 맡았는데요. 종루 위에서 화재를 감시하다가 화재가 일어나면 종을 쳐서 경보를 내리고, 화재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진화 방법으로는 쇠갈고리나 도끼로 불이 난 집을 무너뜨려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고, 물에 적신 보자기로 치솟는 불을 껐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근대식 소방서인 ‘경성소방서’는 1925년에 생겨났는데요. ‘경성소방서’는 소방서장 아래 펌프반, 수관반, 파괴반, 사다리반을 두고 체계적으로 움직였으며 지금처럼 소방 헬멧과 방화복을 착용했습니다. 펌프반은 장정 5~6명이 펌프를 끌고 현장으로 달려가는 역할을 맡았는데요. 당시 펌프 앞머리에는 지금의 사이렌 역할을 하는 쇠종이 달려 출동을 알렸습니다. 파괴반은 갈고리로 재를 긁으며 마지막 불씨를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사다리반은 건물에 올라 사람을 구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당시에는 특별한 화재 예방법이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화재 예방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궁 내부에 ‘드므’를 설치했는데요.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로, 물을 담아 두었다가 목조건물에 화재가 났을 때 진화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드므’ 설치에는 재미있는 속설도 숨어있는데요. 불귀신이 해코지하러 왔다가 ‘드므’ 안에 담긴 물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달아나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 조선 말기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화재 예방을 위해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설치했는데요. 관악산의 정상 연주대의 모습이 불꽃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 불기운이 궁까지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화재를 막는 물의 신수(신령스러운 짐승)로 여겨지는 해태를 세웠습니다. 과거에는 이처럼, 동물의 기운을 이용해 화재를 예방하는 방법들이 사용되었는데요. 일례로, 고려청자를 보면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민심을 다스렸다? 

삼국사기에서는 서기 2년 8월,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가을 8월에 지진이 났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한반도 최초의 지진 기록입니다. 지진으로 인한 첫 피해 기록은 서기 27년 11월인 백제 온조왕 때인데요. 지진 때문에 집이 기울어지고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 779년 신라 혜공왕 때에는 ‘봄 3월에 경도에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고 구체적인 피해 규모까지 나와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기록은 1900년 동안 무려 2000번을 넘어가는데요. 당시에는 지진을 하늘이 노하여 내리는 벌이라 여겼기 때문에 하늘과 민심을 달래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펼쳤습니다. 조선 시대에 천재지변으로 인해 생계를 잃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제도인 “휼전(恤典)” 역시 그 중 하나인데요.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에서 시작된 휼전은 천재지변의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구호활동에 힘썼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국가의 평안을 빌며 불경을 설명하는 ‘백좌법회(百座法會)’를 열었고, 고려 시대에는 속죄하는 제사인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해괴제를 지내는 동안 임금은 음식을 줄이고 술과 유흥을 자제하는 정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가뭄과 홍수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화재와 지진 외에도, 가뭄과 홍수 역시 큰 재난입니다. 선조들은 가뭄의 해결책으로 하늘에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사인 기우제를 올렸는데요. 기우제를 올리는 방식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가 내리도록 빌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상징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기술로 해결하려는 노력도 펼쳐졌는데요. 백제 시대에는 ‘벽골제’라는 저수지 제방을 활용하기도 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측우기를 활용해서 비의 양을 측정해 각 지방의 강우량 분포를 파악했습니다. 또한, 태종은 수로가 좁아서 폭우 발생 시 범람이 잦은 청계천을 정비하기 위해, 개천을 다스리는 기관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청계천 곳곳에 버드나무를 심고 수로를 확보해 홍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지금까지 역사 속 재난 사고와 이에 대처하는 조상들의 노력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재난이 일어나도 포기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 온 우리 선조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더 안전해진 것, 아닐까요?